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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ill Small Voice

Esther

2024년 8월 26일

some thoughts on a teaching methodology

한동안 영어를 포기했었던 한 중학생과 힘겹게 영어문장들을 읽어가며 수업하는 중,

교과서 단어들도 반복적으로 다르게 읽는 통에, 학교 생활이 궁금해졌습니다.

“학교에서 읽는 연습 안해?”

“네. 안해요.”

“진짜? 아니, 무작위로 돌아가면서 읽어보기 같은 거… 안해?”

“네. 애들 자존감에 상처된다고 어떤 부모님이 컴플레인 하셨대요. 그래서 그 담부턴 읽는 거 안시켜요.”

“그럼 누가 읽지? 각자 읽나? 선생님이 다 읽으시는가?”

“잘하는 애들이 자진해서 읽어요.”

그 말을 듣고, 온갖 의문과 혼동, 이해불가함으로 생각과 감정이 복잡해졌습니다:

이런 방식은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학생들이 배우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곳이 학교 아닌가.

왜 연습과 훈련 자체가 일종의 ‘평가’나 테스트, 남과의 비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하는가.

이런 것들에서조차 쉽게 동기를 상실하고 자존감의 상처를 받는 학생들이라면,

이런 것들에서부터 용납될 수 없는 소외와 고통을 말한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삶의 크고 작은 매일의 실망과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근육을 기르는가.

기회의 균등이라는 원리의 공교육에서조차 그런 자존감 개념으로 스스로 기회를 박탈하고

모든 학생을 유아 취급하게 허용한다면 거기에서 오는 장기적 파급 효과,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미성숙함과 개인의 손실은 누가 알려주고 있는가.

잘못 뿌리 내린 우월감/열등감을 교실 내 누가 어떻게 정의하고 체크하고 점검하는가.

건강한 자존감은 무엇을 기초로 하는가.

이런 폭풍 질문들이 한데 엉켜 회오리처럼 한 차례 지나간 후

이 모두를 통째로 갸우뚱하게 하는 조용한 질문이 살포시 떠오릅니다.

한 학생의 말만 들었을 뿐

현명한 교사들이 고심해서 내린 결정이고

특정한 상황에 있는 특정 학생에 대해 타당한 염려에서 나온 의견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의도는 좋지만 정말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다면,

공공의 선을 이루기위해서,

또 장기적인 선을 위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만합니다.

© 2023 by Esther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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